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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마홀 무념 산책 2
기사입력: 2018/05/17 [11:21]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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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현덕 시민

축석령 옛길을 더듬어 걸어 올라가면 울창한 나무 숲이다. 잠시 앉아서 쉬어본다. 한 땀 식히면서, 포천을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만감이 교차한다. 선사시대부터 많은 사람이 살았던 곳이고, 삼국시대 치열한 각축장이었고 남단에는 축석령과 얽힌 효자 오주백의 이야기, 북단에는 궁예와 왕건의 이야기,

이성계의 회군 소식에 한씨 부인과 일족을 이끌고 북으로 피신하던 방원의 이야기가 있다.

 

조선조 삼대가문 서씨일가와 얽힌 이야기가 있고, 조선조 삼대 도적 임꺽정의 이야기도 있다.

사육신의 이야기가 있고 , 일제에 대항하던 함성과 많은 선비들의 꼿꼿한 기상이 엿

보이는 듯 하고,. 면암 최 익현 선생의 이야기가 망국의 한을 되새기게 한다.

6.25 전쟁 막바지 치열했던 전투의 이야기도 모두 이곳에 녹아 있다.

 

축석령에는 효자 오주백 선생이 석청을 얻고자 빌었다는 빈돌 바위가 있었다 한다.

훗날 바위에 얽힌 이야기를 근거로 축석령으로 명명 하였다 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어룡리쯤 가서 더듬어 보기로하자.

 

여하간에 그처럼 역사와 문물의 이동 경로 속에서 살아 숨 쉬고 번영했던 포천의 오늘의 현실을 보면, 짠한 마음에 안타까움이 차가운 파도처럼 가슴을 친다.

왜 우리 포천 시민들은 청치권을 원망하기만 하는가? 왜 맥 놓고 푸념만 하는가?

나이 탓을 하며 방관하고 있는 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며 지팡이로 땅을 쿡쿡 찍어본다.

 

푸념을 덥고 부인터로 가본다. 부인터는 이성계의 첫 부인 한씨가 기거하던 지역이라 한다.

한씨 부인은 훗날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신의 왕후라고 불리게 된다.

그러나 왕궁에서 왕후로 지내보지 못하고 일찍 돌아가셨다.

 

한씨 입장에서 보면 남편은 조선왕국의 시조가 되었고, 두 아들이 왕위에 올랐으니,

본인 가족 중에 세 남자가 왕이 되었다. 한씨가 오래 살았으면 무척이나 뿌듯했을까 ....?

아니면 그들이 벌이는 핏빛 투쟁에 속이 터졌을까..? 권력의 무상함에 허탈해진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함경도를 근거로 헀던 이성계가 포천 지역에 군사 거점을 구축한

이유도 포천 지역이 함경도로 가는 길목이라는 지형적 여건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고려 말 사병 제도를 유지한 정치 구조에서 혼란한 정치 현실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사병을 개경 근처에 두어야 했으리라 그러나 이성계의 기반은 함경도 인근으로 개경에서 멀고 접근로가 마땅치 않았으므로 유사시 지원 병력을 함경도에서 개경으로 이동 시킬 수 있는 통로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런 통로가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경쟁 세력이 추가령 구조곡을 통한 도로를 봉쇄한다면

난감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막강한 병력을 가지고 있어도 속수무책으로 개경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 하기 위해서 주 병력을 인도할 교두보를 확보하려고 포천에 농경지를 마련하여 군량미를 조달하면서 병력을 주둔 시켰으리라 생각된다.

포천은 개경의 위정자들이 볼 때 크게 눈에 거슬리지는 않으면서도 거리는 가깝다

조선 건국 이후 한양으로 천도한 속 사정도 같은 맥락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이성계의 부장 이지란은 본래 퉁두란이라는 여진족 사람이었다 그가 포천에 인연을 맺은 것도 이성계의 사병이 포천에 주둔한 것이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훗날 신덕왕후가 된 강씨 부인은 좀 떨어진 가산면 궁말에 기거하였다.

부인들이 기거한 곳을 분리한 것도 혈족을 각 지역에 분산 시켜 유사시에는 몰살 당할 확률을 낮추면서 지역별 장악력을 확고히 하는 장점을 고려했을 것이다

이지란의 병력은 지금의 창수 근처에 근거를 두고 개경을 견제했을 것 같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했을 때, 이방원은 어머니 한씨와 강씨를 포함한 식솔들을 데리고

몸을 피한다. 아마 이성계 부자간에 회군 시 대응책을 연구해 두었을 것 같다.

방원 일행은 최영이 식솔들을 잡으려 할 것을 우려해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도망 다녔다

며칠 후 위화도 회군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포천으로 돌아왔다.

실제로 최영은 이성계 가족을 잡으려고 병력을 이동 하였으나 이성계가

신속히 개경에 들이 닥치는 바람에 가족들을 잡지 못한 상태에서 상황이 종료 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조선왕조의 갈림길이 된 중요한 사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가족이 잡혔다면 그 상태에서 이성계의 선택은 어땠을런지 궁금하다.

회군 후 즉시 건국을 하지 못했던 이성계의 현실적 문제나 명분 등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이성계는 우왕을 폐하고 다른 왕족을 세우려 했지만 조민수의 반대로 창왕을 옹립하게 된다. 즉 이성계는 아직 힘에 부치는 상황이었던 것 같다

 

여하간 최영의 시국 판단과 정보력 등이 부족했던 점과, 여러 가지가 뭉뚱그려져서 조선이

등장 하고 그 분기점에서 이성계 일족의 신변 안전은 중요한 사건이라 해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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