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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마홀 무념 산책
해룡산주변 2
기사입력: 2018/08/22 [10:00]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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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현덕 시민   © 포천뉴스

해룡산은 풍수지리 하는 분들이 손 꼽아주는 명산 중에 하나이다. 조선시대에는 해룡산에서 왕실 주도의 기우제도 지냈고 강무장도 있었다.

 

해룡산 정상 안내 표지판에는 해룡산 기우제를 연상하는 글이 있다.

 

"해룡산은 회암령인 천보산을 따라 산계를 형성하고 동북으로 뻗어 탑동 왕방마을 오지재고개에서 끝나며 왕방산과 접한다. 탑골(장림)마을 동쪽에 위치한 정상에는 천호 (또는 감지 라는 연못으로 비를 빌면 효험이 있으며 사람이나 말이 연못가를 밟으면 비가 오거나 흐리기도 한다하였고 지금은 그 자리를 알 수 없음 )가 있었다고 <<동국여지 승람>>에 적고 있다"

 

또한 어수정이라는 우물이 있어 이곳을 찾는 왕이 이 우물을 마셨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해룡산과 인접한 칠봉산은 봉우리 이름이 깃대봉, 석봉, 투구봉, 등 강무와 관련된 이름이 많이 있다.

 

해룡산 근처에는 이태조의 족적이 많이 남아있다. 신의왕후 한씨의 전장이 재벽동에 있었고, 철현에는 강씨의 전장이 있었다. 즉 이태조의 군사 거점도 포천 해룡산과 왕방산 인근에 있었다는 반증이라 생각 된다.

 

소흘 쪽으로는 태조 왕건(王建)의 소생인  정희왕녀의 태(胎)를 태운 재를 이 산꼭대기에 묻은 뒤로 태봉(胎峰)이란 이름이 생겨났다고 전해오는 태봉산이 있다 이 산 정상이 왕녀봉(王女峰)이라고 불려지며,현재 태항(胎缸)은 도굴되어 없어졌고, 화강암 석대(石臺)만 남아있다. 인근 지역은 공원으로 조성하였으며, 주변은 태봉마을 이라 부르고 있다.

 

해룡산 아래에는  조선조 3대 가문을 이룬 약봉 서성선생의 묘가 있다. 약봉은 문무를 겸비한 사람으로 겸양지덕을 칭송 받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문무의 여러 분야의 요직을 거치고 암행어사도 오래 했고 왕을 근거리에서 모셨던 분이다.

 

임진왜란 중에는 왜적이 한양으로 접근하자 임금의 행차를 모셨고,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되어, 임해군(臨海君), 화순군(和順君) 두 왕자를 모시고 북으로 이동 하던 중, 왕실을 반하는 현지인들에게 잡혀 두 왕자와 같이 왜적에게 넘겨져 포로가 되어 있다가 단신 탈출하여서 많은 의병을 모아 거느리고 북평사(北評事) 정문부(鄭文孚)과 함께 싸워 주민들을 독려하였다.

 

그러자 관민이 합세하여 군사를 일으켰고, 명천(明川)·길주(吉州) 등의 적을 토벌했고, 관북을 회복함에 크게 공을 세웠다. 그러나 경과 보고시에는 자신의 공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한다.

 

생각하면 왕자들이 백성들에게 잡혀서 왜군에 넘겨진 사태는 왕실의 위상이 어땠는지 여실히 보여지는 상황이고,  왕실을 배제한 중국과 일본의 협상내용도 한심하다고 해야겠다.

 

왕자가 미끼가 되고, 조선 분활 협상이 있었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민초들은 목숨을 걸고 의병으로 나섯던 것이다. 무책임하고, 의심 많은 왕이 전쟁 영웅을 견제하는 한심한 사태도 기억 난다.

 

해룔산에는 암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행촌 이암 선생이 해룡산에 있었던 태소암에서 <<환단 고기>> 중 <단군세기>를 집필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암(李嵒, 1297년 ~ 1364년)은 고려 말의 문신이다. 본관은 고성(固城), 호는 행촌(杏村),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자손 중에는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원(李原)을 비롯하여 조선초기와 조선중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관과 무관을 배출하면서 조선의 명문 가문이 되었다.

 

이암은 고려 말기 최고의 명필로 알려져 있으며, 일부 평론가들은 그의 유려하고 힘있는 글씨가 조맹부를 능가한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이암은 서예가로서 뿐만 아니라 시와 그림에도 뛰어났다. 또한 <환단고기>중 <단군세기>의 원작자로 알려져있다.

 

《환단고기》는 《삼성기 )》,《단군세기》,《북부여기》,《태백일사》의 4가지 로 구성 됬다 이 책은 고대 한국사를 다루고 있으나, 정사로 받아 들여 지지는 않고 있다.

 

이는 중국의 역사가 5000년 전부터 이므로, 조선 시대까지의 한국사는 5000년을 넘을 수 없었던 정치적 한계에 따른 것일 수도 있다.

 

최근의 유적 발굴 등을 통해서 동양의 홍산문명이 7000년 이상 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고, 중국의 황하문명은 5000년 정도로 보고 있으므로 만주와 요하를 아우르는 고대 한국의 역사를 7000년 정도로 보는 사람도 많이 있다. 홍산 문명의 유물들은 한반도에 넓게 분포하고 있고 고양의 가와지 5000년 이상 된 볍씨가 자연성장한 것이 아니고 경작한 농산물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마지막 빙하가 풀릴 당시 지형과 기후를 생각하면 만주 중심의 동북아 지역이 온화하고 문명이 성장하기에 적합한 지역이였음을 상상 할 수 있다. 환단 고기는 7000천년의 역사를 다루고 있어서 한번쯤 되집어 볼만 하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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