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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마홀 무념 산책
해룡산주변 5 <화산서원>
기사입력: 2018/11/02 [09:41]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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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현덕   © 포천뉴스

포천 화산서원은 가산면 방축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서원이다. 오성 대감으로 알려진 이항복(1556∼1618)의 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1975년 9월 5일 경기도의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항복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선조 13년(1580) 문과에 급제하였다. 병조판서와 영의정을 역임하였고, 후에 청렴한 관리로서 ‘청백리’에 추대되었다.

 

화산서원은 숙종 46년(1720)에 국가에서 인정한 사액서원으로 ‘화산’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에 폐쇄되었다가 1971년 포천 유림에서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인덕각과 동강재, 필운재 등과 출입문인 내,외삼문이 있다. 동강재와 필운재는 학문을 토론하거나 유림이 모임을 갖는 장소로 쓰고 있다.

 

이항복은 임진왜란 당시 피난길에 선조를 호종했으며, 명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하는 등 외교 활동에 주력했다. 전란 중에 이항복의 큰형은 피난중 물에 빠져 익사했고, 어린 딸이 병으로 위독할 때 국사에 전념 하느라 가족을 돌봐주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위하자 폐위 반대 상소를 올렸던 것이 계기가 되어 파직 유배 된다. 유배지인 함경도의 북청에서 고령에 지병까지 있어서 유배생활 5개월 만에 생을 마감 했다.

 

한음 이덕형과의 평생에 걸친 우정은 '오성과 한음'으로 회자되는 교우 관계를 유지했다. 인목대비를 폐위한 사건으로 두 사람 모두 벼슬에서 쫓겨났고 한음 이덕형은 지방에 내려가 살다가 여생을 마쳤고, 오성 이항복은 북청으로 유배되어 유배지에서 병사한다.

 

이항복의 유배길은 결정 과정에서부터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관직삭탈’에 그쳤으나 반대파들의 영향으로 ‘거주 제한 ’조치로 강화 되었고 그후 원거리 ‘유배’로 처벌의 강도가 높아졌다. 유배지도 논란을 거쳐 험난한 북청으로 결정되었다. 

 

서울에서 북청까지는 1,000여리의 유배 길을  제자 정충신이 동행했다, 유배 길에 지나는 고을마다 관찰사, 절도사들이 나와 영접했다고 한다, 그를 추앙하는 사람이 많았고, 그에 대한 대중적 신뢰를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혹독한 추위를 겪으며 북청에 도착한 백사는 유배지에서 병을 얻어 세상을 하직한다.

 

이항복과 당시 정계 유력 인사들을 일거에 제거한 정변의 사태는 칠서의 난이라는 단순한 사건에서 시작 되었다

 

1614년 일곱 명의 서자들이 적서 차별에 불만하여 서얼(庶孼) 허통(許通)의 연명 상소를 올렸으나 무시당하자 불만을 해소하는 방편으로 도적질을 하는 등 행패를 부리던 중에 상인을 약탈하는 일이 있었다.  권력 실세 였던 이이첨은 흔히 있을 수 있는 범죄를 정치적 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이들을 역모세력으로 둔갑시키고 정적 제거에 나선다.

 

이이첨은 이들이 김제남과 연합하여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자백을 만들어 내었다. 이를 근거로 김제남은 처형당하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됐다가 사형 당한다. 그 뒤 역적의 딸이며 역적의 어머니인 인목왕후가 대비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여론을 형성시켜서 인목대비의 폐비하게 된다.

 

이 사건은 조선 사회에서 중요시 하였던 부모와 자식 간의 인륜을 어긴 것으로 폐모살제(廢母殺弟)로 규정되면서 비난의 대상이 되고 훗날 인조반정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죽거나 유배되었고 , 인조반정 과정에서도 엄청난 수의 정치인과 학자들이 죽임을 당하게 된다. 주목할 것은 광해군과 인조는 물론이고 이 소용돌이와 상잔에 관여한 주요 인물들이 서로 친인척으로 얽히고 설켜 있었고 , 광해군의 애정행각등 복잡한 치정관계도 많았으니 서로 아는 사람 사이에서 속고 속이는 권모술수의 난장판 이었다.

 

정치의 추악한 단면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항복 선생도 이 소용돌이 속을 빠져 나오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운명을 달리 했던 것이다.

 

이 사건과 관련 허균의 이야기도 관심을 끈다. 이이첨은 허균이 인목대비 폐비론에 참여하는 등 광해군의 신망이 놉아지는 것이 마땅치 않았다.

 

이이첨의 외손녀인 세자빈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있는 판에 허균의 딸은 소훈이 되어 입궐한다. 이이첨은 더욱더 허균을 경계한다. 이이첨은 칠서의난을 기회로 삼아서 허균까지 싸잡아서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칠서의 난에 사용한 격문을 허균이 작성 했다고 모함 한다.

 

그러나  칠서의 난에 연루된 일곱명의 서자들은 온갖 고문에도 끝내 허균을 지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목숨을 부지하지만 그 후 여러 차례의 권력의 부침을 격고 결국 역심을 의심받아 능지 처참형을 받고 죽는다.

 

그는 죽음을 예상하고 당시 나이어린 외손자 이필진에게 그의 작품을 남겨 후대에 전하도록 하였다. 홍길동전과 성소부부고 등을 다수의 문집을 남겼다.

 

특히 홍길동전은 무명으로 발표하였으나 나중에 유몽인이 그의 작품이라는 기록을 남겨 알려지게 되었다. 허균이 홍길동전을 집필한 것은 그의 심중을 보여준 것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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